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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BICian’s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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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쉼 없이 달려온 일 년을 돌아보며
  • 작성자 정해영 (KOBIC 센터장/책임연구원)
  • 작성일2024-12-30 08:23:26
  • 조회수1004
  • 댓글수0

KOBIC에서 일하면서 달리기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매년 종합건강검진을 위해 문진표를 작성하면서 평소에 숨이 약간(또는 많이) 차게 만드는 운동 및 근력운동을 하느냐는 질문에 항상 ‘아니오’라는 민망한 답을 써 오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지난 8월 5일부터 갑자기 달리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별다른 시설이나 장비가 필요하지 않고, 혼자서 할 수 있다는 것도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퇴근 후 주 3~4차례 달리기를 위해 집을 나설 때마다 오늘은 또 얼마나 힘이 들지 늘 걱정이 됩니다. 워밍업은 매번 충분하지 않아서 출발 직후에는 몸이 무겁고 관절도 부드럽게 돌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적 드문 한밤의 갑천변 산책로를 무념무상으로 뛰다 보면 점점 몸이 더워지고, 어느덧 대략 3 km 지점의 반환점을 돌아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면서 동네 입구의 아파트 불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얼마 남지 않았구나!’ 마치 재부팅 뒤 컴퓨터가 깨끗해지듯, 오늘 하루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온갖 스트레스와 잡념은 싹 지워집니다. 겨울밤의 추위는 별다른 방해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덥고 땀이 난다고 하여 함부로 웃옷 지퍼를 내리고 몸을 차갑게 하면, 저처럼 체온 관리에 실패하여 심한 감기에 걸려 연말까지의 달리기 계획을 모두 접어야 할 수 있습니다. 달리기의 유익함을 틈나는 대로 주변에 설파하다가 감기에 자주 걸려 체면을 많이 구겼습니다. 역시 ‘런린이’(러닝 + 어린이, 달리기 초보자)의 입방정이 문제였던 것이겠지요.

 

멀게만 느껴지던 일 년의 끝이 손에 잡힐 듯 겨우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 신발끈을 고쳐 매듯 마음을 다잡고 KOBIC에서의 업무를 시작하였는데, 어느덧 꽤 많은 거리를 달려왔고 이제는 주변의 풍경도 여유롭게 감상할 수준이 된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정말 많은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인 차원의 걱정 말고는 특별히 신경을 쓸 일이 없었지만, 이제는 쏟아지는 사안의 중대성을 재빠르게 판단하여 처리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결재 버튼을 눌러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충분한 정보를 수집하였는지, 과연 합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올바르게 판단하였는지, 지금 내리는 결정이 조직의 책무에 부합하는지, 미래를 위한 대비는 올바르게 하고 있는지, 센터장이라는 페르소나에 충실하기 위해 감정을 더욱 절제하고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하는지, 조직의 생존을 위해 외부에 대해 지금보다는 더욱 싸움닭 같은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지금도 제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물음표가 맴돌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짐을 저 혼자만 질 필요는 없었습니다. 너무나 헌신적으로 일하는 KOBICian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큰 과오 없이 지난 일 년을 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과학자라고 하면 연구실에 틀어박혀 지식의 탐구에 몰두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KOBIC은 바이오 소재 정보와 데이터의 교환소, 즉 ‘장터’와 같은 곳으로서 저마다 목소리를 내는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듣고 서로가 만족하면서 가치 교환을 이룰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창고는 튼튼해야 하고, 재고 목록은 늘 제대로 업데이트되어 있어야 하며, 비가 새거나 차고 더운 바람이 들어오면 곤란하고, 때로는 차 한잔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쉬어 갈 수도 있어야 합니다. 제가 느낀 KOBICian은 연구자 또는 엔지니어로서 개인적으로 성취하고 싶은 일은 잠시 내려놓고 일절 사심 없이 저희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려는 고객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느끼는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일상은 매주 KOBICian’s Story 원고를 매만질 때입니다. 게시할 새로운 글을 자발적으로 투고하는 것은 업무에 바쁜 KOBICian들께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해서 각자 KOBIC 내에서 어떤 소중한 일을 하고 있는지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에서도 이 글을 통해 유용한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고 알려 왔을 때에는 정말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간혹 다른 글에 비하여 조회수가 월등하게 높은 글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글이 흥행에 성공한 이유가 무엇일지 나름대로 분석을 해 보게 됩니다. 워낙 좋은 내용으로 글을 썼고, 또한 제목을 아주 효과적으로 잘 뽑았기에 외부에서 검색을 타고 유입되는 방문자가 많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혹은 글을 쓴 사람 자체가 KOBIC 내부에서 호기심을 유발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엇, 안 그래도 평소에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었는데 도대체 무슨 글을 올렸을까?’하는 기대감으로 조회수가 올라갔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쪽이 사실이든, KOBICian 개인이 갖고 있는 원석과 같은 가치를 더욱 많은 사람에게 노출하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025년의 KOBICian’s Story는 3월에 다시 여러분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한 해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KOBICian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KOBICian’s story는 KOBIC 멤버가 직접 작성하는 현장감 넘치는 글로서 KOBIC의 업무 방향이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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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BIC에서 인체유래데이터은행 업무를 수행하며 동의서를 검토할 때마다 느끼는 답답함이 있습니다. 연구자들이 제출한 동의서를 살펴보면 대부분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별지 제34호 서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류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동의가 실제로 보장하는 것은 주로 인체유래물, 즉 물리적 생체 시료의 취급입니다. 정작 그 시료에서 생성되고 분석된 데이터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합니다.

 

현행 제도하에서 연구자는 연구 수행을 위해 연구대상자로부터 [별지 제34호 서식], 이른바 '인체유래물 연구 동의서'를 기준으로 동의를 받습니다. 이 서식은 물리적 자원인 인체유래물의 유한성과 품질 저하를 전제로, 보존기간과 사용 범위, 반출 조건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준이 데이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면서 실무에서 반복적인 충돌을 일으킨다는 점입니다. 데이터는 한 번 생성되면 내용이 닳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며 분석기술이 발전할수록 새로운 의미가 발견됩니다. 그럼에도 데이터를 소모되는 자원처럼 다루면, 동의서의 시곗바늘이 멈추는 순간 데이터의 활용 가능성도 함께 멈추게 됩니다.


현장에서는 동의서에서 정한 보존기간이 끝난 데이터가 연구적으로 여전히 유효한 자산으로 남아 있지만, 제도적 불확실성 때문에 활용을 중단하고 폐기해야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는 비단 연구 일정의 지연 문제뿐만 아니라, 공공이 투자해 만든 데이터 자산의 경제적·사회적 효율이 떨어지는 일입니다. 특히 희귀질환이나 소수 집단 연구의 경우, 데이터 재수집이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도 많아 이러한 손실은 더욱 큽니다.

 

동의의 핵심은 보존기간이 아니라 거버넌스입니다. 해외는 데이터의 지속성을 인정하고, 대신 접근 통제와 추적, 감사(audit) 등 절차적 장치를 통해 기증자의 권리와 사회적 공익을 동시에 지킵니다. 미국 NIH에서 사용하는 동의서는 연구자가 연구계획서에 명시한 기간으로 보존기간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하며, 무기한 지정도 가능합니다. 영국 UK Biobank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수집된 데이터와 샘플뿐만 아니라 기증자의 의료기록 등 건강 관련 기록에도 접근이 가능하며, 무기한 장기 보존을 원칙으로 합니다. 이는 기증자가 행위무능력 상태가 되거나 사망한 후도 포함됩니다.

 

반면 대한민국의 [별지 제34호 서식] 동의서는 연구 목적과 인체유래물 종류 및 수량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게 되어 있으며, 기증자가 보존기간을 지정합니다. 제3자 제공은 기증자가 선택한 "포괄적 연구 목적" 혹은 "유사한 연구 범위"에 한해서만 가능하고, 해외 연구자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동의(개인정보 보호법 제28조의8)가 필요합니다. 데이터를 연구 목적으로 제3자에게 널리 분양하려면 [별지 제41호 서식]을 작성하여 인체유래물은행에 기증하는 절차까지 거쳐야 한다는 국내의 제도를 정확히 몰라서 데이터의 재활용이 잘 되지 않는 문제도 심각합니다.

 

이러한 제한적 구조는 기증자 보호라는 명분은 강하지만, 실제 데이터 활용의 유연성은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만약 한 연구자가 10년 전 암 환자들로부터 동의(보존기간: 동의 후 5년)를 받아 특정 유전자 변이와 항암제 반응성 연구를 완료하고 그 과정에서 생성된 유전체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최근 급속히 발전한 AI 기반 바이오마커 발굴 기술울 이용하여 이로부터 새로운 치료 타깃을 찾는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면, 데이터는 이미 존재하고 연구 목적도 동일하지만, 동의서에 명시된 보존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수백 명의 기증자를 다시 찾아가 재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최초 동의 시점에서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다수 환자의 연락처가 바뀌었거나 이미 사망하여 재동의를 받기 어려운 경우, 해당 데이터는 사장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답의 실마리는 데이터에 특화된 표준동의서입니다. 먼저 해외 사례처럼 broad consent(포괄적/광범위 동의)를 채택해 연구 과제 단위를 넘어 목적군 단위로 재사용을 허용해야 합니다. 보존기간을 설정하는 대신 보안과 거버넌스로 위험을 관리하고, 동의를 일회성이 아닌 갱신 가능한 약속으로 전환해 기증자가 자신의 선택을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변경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동의 체계는 세 가지 원칙 위에 서야 합니다.

 

기증자 중심. 선택과 철회, 갱신의 권리를 쉬운 용어와 온라인 절차로 보장하여, 기증자가 자신의 데이터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권한은 필요한 만큼만과정은 투명하게.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범위만 접근을 허용하되, 모든 과정은 기록하고 공개합니다. 데이터 접근 이력을 추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후 감독 체계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권리와 공익의 균형. 개인정보 보호를 전제로 연구의 사회적 가치를 제고하기 위해, 개인의 권리와 사회적 이익이 상충할 때 투명한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균형점을 찾아야 합니다.

 

인체유래데이터의 가치를 최대한 실현하면서도 기증자의 권리를 지키는 새로운 동의 패러다임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 작성자정재은 (KOBIC 선임기술원)
  • 작성일2025-10-27
  • 조회수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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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계에 놀라운 생명 현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베리아반도에 서식하는 특정 수확개미 종에서 한 여왕개미가 두 가지 서로 다른 종의 수컷을 생산하는 '제노페리티(Xenoparity)'라는 현상이 관찰된 것입니다. 이는 생명의 진화와 번식 전략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 학계에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개미의 수컷(n)은 수정되지 않은 알에서 단성생식으로 생겨나는 반면, 일개미(2n)는 수정된 알에서 발생한 생식 능력 없는 암컷이라는 기본 상식을 일단 기억해 두시면 좋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이베리아반도에서 발견되는 '이베리아 수확개미'(학명 Messor ibericus)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연구진은 유럽 전역에서 개미를 채집하여 유전적 다양성을 분석하던 중, 예기치 않게 충격적인 데이터를 발견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개미 집단 내에서는 유전적 이형 접합성(heterozygosity)이 낮게 나타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는 같은 종 내에서의 번식을 통해 유전자가 유사하게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베리아 수확개미 중 일부 일개미 집단에서 유독 비정상적으로 높은 이형 접합성이 관찰되었습니다. 이는 엄마와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가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유전자 분석 결과는 이들 일개미가 순종이 아닌 '잡종 일개미'일 가능성을 말하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베리아 수확개미의 일개미는 100% 잡종으로만 발견되며, 순종 일개미는 전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반면 여왕개미는 예외 없이 순종으로만 존재하였습니다.

 

연구진은 이 잡종 일개미들이 누구로부터 태어났는지 추적하기 위해 DNA 분석을 진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잡종 일개미의 엄마는 이베리아 수확개미이고, 아빠는 '스트럭터 수확개미'(학명 Messor structor)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즉, 두 가지 서로 다른 종의 개미가 교배하여 잡종 일개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DNA 서열 분석을 통해 확인된 것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미스터리가 발생했습니다. 잡종 일개미가 발견되는 지역의 분포를 살펴보니, 이베리아 수확개미와 스트럭터 수확개미가 모두 서식하는 지역뿐만 아니라, 아빠 종인 스트럭터 수확개미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 시칠리아 같은 지역에서도 잡종 일개미가 무더기로 발견된 것입니다. 마치 호랑이가 없는 동물원에서 라이거(숫사자와 암범의 종간 잡종)가 태어난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스트럭터 수확개미가 없는 지역에서 이 잡종 일개미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연구진은 이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26개의 이베리아 수확개미 군집 내에서 수컷 132마리를 채집하여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44%의 수컷은 털이 많은 형태였으며 나머지 56%는 거의 털이 없는 뚜렷한 형태적 이형성(morphological dimorphism)이 관찰되었고, 계통 분석(phylogenetic analyses)으로도 털이 많은 수컷은 '이베리아 수확개미'(M. ibericus) 그룹에, 털이 없는 수컷은 '스트럭터 수확개미'(M. structor) 그룹에 속하였습니다. 이로써 스트럭터 수확개미 수컷이 이베리아 수확개미 군집 내에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스트럭터 수확개미 수컷이 어떻게 이베리아 수확개미 군집 내에서 발견되었는지 또다시 의문이 생겼습니다. 연구진은 스트럭터 수확개미 수컷의 분자 분석(molecular analyses)을 통해 비밀을 밝혀냅니다. 분석 결과, 스트럭터 수확개미 수컷은 군집 내의 이베리아 수확개미 개체들과 동일한 미토콘드리아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군집 전체가 공통의 이베리아 수확개미 어미로부터 기원했음을 의미하며, 이베리아 수확개미 여왕이 두 종의 수컷을 모두 생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증거였습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수컷 개미는 수정되지 않은 알을 통해 모계로부터만 유전자를 상속받는 반수체(haploid)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컷 개미는 모계의 DNA만을 가지고 있게 되지만, 이베리아 수확개미 여왕이 낳은 스트럭터 수확개미 수컷의 핵에는 엄마인 이베리아 수확개미 여왕의 DNA는 없고, 아빠인 스트럭터 수확개미의 DNA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생물군에서도 관찰된 바 있으며, 무핵 난자 수정 또는 모계 유전체 제거로 인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연구 결과는 이러한 현상이 종 간의 장벽을 넘어 다른 종의 정자로부터 수컷을 생산하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발견입니다.

 

 

연구진은 이 새로운 번식 시스템을 '제노페리티'(Xenoparity)라고 일컬었습니다. '제노(Xeno)'는 '다른, 이상한, 외부의'라는 뜻이고, '패리티(parity)'는 '생식한다, 번식한다'는 뜻으로, '다른 종의 새끼를 낳는다'는 의미입니다.

 

맨 처음에는 이베리아 수확개미 여왕도 실제 야생계통(wild-type lineage)의 스트럭터 수확개미 수컷과 교배를 통해 잡종 일개미를 생산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타종의 수컷이 꼭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며, 의존하는 시스템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 이후 '정자 기생' 단계를 넘어 그 종의 수컷을 복제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자연 선택되었고 제노패리티 시스템이 진화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세포·유전학적 기전으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미스테리입니다.

 

이베리아 수확개미의 이러한 독특한 번식 시스템은 생명의 경이로움과 진화의 무한한 창조력을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생명의 진화는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창의적인 것 같습니다.

 

 

<참고 자료>

Juvé, Y., Lutrat, C., Ha, A. et al. One mother for two species via obligate cross-species cloning in ants. Nature 646, 372–377 (2025). https://doi.org/10.1038/s41586-025-09425-w

 

사이언스지의 뉴스(https://www.science.org/content/article/ant-queen-lays-eggs-hatch-two-species)

Smithsonian Magazine 기사(https://www.smithsonianmag.com/smart-news/these-ant-queens-seem-to-defy-biology-they-lay-eggs-that-hatch-into-another-species-180987292/)

GeekNews(https://news.hada.io/topic?id=23186)

  • 작성자최진혁 (KOBIC 선임연구기사)
  • 작성일2025-10-20
  • 조회수152
  • 댓글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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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공개될 월요일 무렵이면 저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행을 그렇게 즐기는 사람은 아닙니다. 무슨 일이든 계획대로 풀리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성격 때문입니다. 이번 여행은 추석 연휴 동안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딸을 일 년 만에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며칠간의 연차 휴가를 덧붙인 특별한 여행이었습니다. 최근 환율도 너무 올랐고 외국에 대하여 우호적이지 않은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 때문에 입국 심사 과정에 혹시 차질은 없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출국 직전까지 서울과 고양, 그리고 제주도를 오가면서 바쁜 업무를 소화하느라 혹시 비행기를 못 타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지 많은 걱정을 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여정이 끝나가는 지금까지 별다른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귀국 비행기를 타기 전이라서 안전하게 여행을 다 마쳤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모든 걱정의 95%는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실감하였습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일은 대부분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이거나, 또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일이라서 걱정을 해 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행이란 어찌 보면 통제할 수 없는 알약 하나를 삶에 풀어 넣고 들이키면서 이를 즐기거나 심지어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기회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날씨가 완벽하고, 공항 수속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숙소는 청결하고, 모든 것이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경험만 한다면 그만큼 재미없는 여행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도 이번 뉴욕 여행에서 구글맵에 의존하여 현대미술관(MoMA)을 찾아가다가 잠시 길을 잘못 접어들었을 때, ‘파파라치 도그맨과 래빗걸’(Paparazzi Dogman & Paparazzi Rabbitgirl)이라는 공공미술 조각 작품을 우연히 만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영어 소통은 여행에서 접하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언어란 원칙적으로 통제 가능하지만 능통해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기 때문이지요. 브롱크스행 지하철이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다른 노선으로 우회한다는 안내 방송을 가까스로 알아듣고, 작년에 뉴욕을 방문하여 지하철에서 겪었던 얄팍한 경험―엄청나게 고생했다는 뜻임―을 동원하여 분기점 역에서 가까스로 내렸습니다. 뒤 그곳으로부터 목적지를 가기 위해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센트럴파크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며 정말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였습니다. 그 순간에는 순발력있게 잘 대응했다고 잠시 우쭐하였지만, 결국 식당이나 카페에 가서는 의사소통 문제로 또다시 좌절감을 겪었답니다.


인생이라는 잘 설계된 짐꾸러미에 내가 원하지 않으니 ‘우연’을 넣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것이고, 일부러라도 넣어야 한다는 것이 이번 글의 주제입니다. 생물학적 언어로 말하자면 우연은 변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변이는 혁신의 원동력이자 피할 수 있는 생명의 속성입니다. 변이체는 지금 당면한 현실에 가장 적합한 형태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다양한 변이를 시도할 때 변화하는 환경에 언젠가 적응하여 세상의 주류가 되는 날이 오게 됩니다. 종종 이방인이나 소외자가 세상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요.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 너무 단조롭고 원하는 대로 술술 잘 풀린다는 생각이 든다면, 우연이라는 난수 발생기를 일부러라도 한번 돌려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여행은 아주 좋은 선택이 됩니다.


여행은 문화와 역사에 대한 시각을 넓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예를 들어 뉴욕시에는 화재 탈출용 철제 사다리(fire escape)를 외부에 갖춘 고풍스러운 주거용 건물이 아직도 많이 있는데, 이는 당시 법 규정을 준수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서 건물이 지어진 지 최소한 90년이 넘었음을 증명합니다. 원주민과 주류 이민자 및 사회적 약자를 포함하여 뉴욕이라는 도시를 형성하는 다양한 구성원의 권리와 문화를 존중하고 포용하려는 운동과 전시를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면 본인의 경제적 형편에도 잘 맞아야 하고, 세계와도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저개발국가의 싼 물가를 이용하여 호사를 누리는 여행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그곳을 방문하여 돈을 쓰기 때문에 그들이 고용 상태를 유지하고 그 나라의 경제가 돌아가게 한다는 다분히 소비자적이면서 우월한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여행은 그 나라의 고유한 문화나 자연환경을 해치고, 그들을 저임금 관광 산업 종사자로 얽어매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뉴욕시 지하철에 붙은 질서 유지 안내문에서 부주의하거나 무관심한 방문자(inattentive visitors)는 되지 말아 달라는 글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관광객이니까 아무리 실수를 해도 용서가 되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전 세계에서 밀려드는 관광객을 상대하면서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현지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K-문화 신드롬 때문에 이제 한국을 찾는 외국 관광객도 급증하였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배타적인 생각을 갖지 말고, 우리가 외국에 나가서 잘 대우받기를 기대하듯이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을 대해야 합니다.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가 만들어진 이유는 아니다.’라는 멋진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연은 모험과 성장의 씨앗이 됩니다. 인생이라는 긴 항해에서 우연은 늘 예기치 못한 바람처럼 불어옵니다. 그 바람이 때로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항구를 떠나야 비로소 바다의 넓이를 알 수 있듯이,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야 세상의 다양함과 인간의 너그러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번 여행이 제게 가르쳐 준 것은, 안전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우연이 열어주는 성장의 가능성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여 편의 유튜브 쇼츠가 추억으로 남았고, 이를 만드느라 동영상 편집 기술도 많이 늘었답니다.

  • 작성자정해영 (KOBIC 센터장/책임연구원)
  • 작성일202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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