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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BICian’s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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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 데이터 거버넌스의 여러 모델
  • 작성자 정해영 (KOBIC 센터장/책임연구원)
  • 작성일2025-06-23 00:00:00
  • 조회수514
  • 댓글수0

요즘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낱말이 심심치 않게 많이 쓰입니다. 동사 govern이 ‘지배하다, 통치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으니 이로부터 파생된 거버넌스는 ‘통치, 지배, 관리, 운영’ 정도의 뜻을 지닐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서 다른 낱말과 같이 쓰이면서 그 의미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데이터 거버넌스’와 같은 것입니다. 거버넌스의 현대적 의미는 조직이나 기관 또는 시스템을 지휘하고 관리하며 책임을 지는 방식의 틀, 절차 그리고 관행입니다. 동사 govern에서 파생된 또 다른 명사 government(정부)는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소통이 주류를 이루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거버넌스에서는 외부와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개방적이면서도 열린 조직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전을 찾아보면 거버넌스를 ‘협치(協治)’로 풀이합니다.

 

현대 지능정보사회에서 데이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양질의 데이터를 확보하여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법령을 준수하며, 나아가서는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 데이터를 전략적 자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잘 설계되고 실행 가능성을 갖춘 데이터 거버넌스가 필요합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과학 논문이 유료 저널에 게재되는 일이 흔해지고 데이터 접근도 어려워지자, 오픈 사이언스 재단에서는 2002년 부다페스트에 모여서 과학 및 학술 연구 결과물을 누구나 자유롭게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원칙을 제시하였습니다. 2021년 UNESCO에서는 194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오픈 사이언스 권고안을 채택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오픈 액세스, 오픈 데이터, 오픈 인프라, 시민 참여 및 전통 지식 체계와의 대화 등 오픈 사이언스의 핵심 요소를 구성하고 실행을 위한 우선 과제를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권고안의 탄생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COVID-19 팬데믹이라는 대재앙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였습니다. 병원체 게놈 정보의 신속한 공개 덕분에 빠른 진단과 백신·치료제 개발이 가능하였고, 데이터 공유를 통해 신속하고 동시다발적인 연구 협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UNESCO의 오픈 사이언스 관련 문서에도 실려 있습니다.

 

오픈 사이언스 원칙의 올바른 실행 측면에서도 데이터 거버넌스는 큰 의미를 갖습니다. 단지 연구 데이터를 개방한다고 해서 이를 모두가 신뢰하고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데이터의 품질을 일정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 그 사용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며, 접근 권한을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은 모두 데이터 거버넌스의 영역입니다. FAIR(Findable·Accessible·Interoperable·Reusable) 원칙은 오픈 사이언스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오픈 사이언스를 실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 KOBIC의 국가바이오데이터스테이션은 외부 기관과 협력하여 FAIR 성숙도를 점검하는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오픈 사이언스는 얼핏 생각하면 데이터의 자산화 경향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데이터를 생산한 주체는 이를 소유물로 인식하고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산업계에서는 당연히 이를 보호하고자 합니다. 정부 연구개발과제로 생성된 연구 데이터를 국가적 전략 자산으로 여겨서 통제하려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특히 유전체 정보나 보건의료 정보는 개인 차원에서 보호해야 하는 민감정보이자 기업·국가 차원의 경제적 자원이지만, 새로운 연구 성과로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재료이므로 공공적 활용을 더욱 촉진하기 위해 개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이러한 요구사항을 전부 충족시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니 적절한 중간 지점에서 타협해야 합니다. 데이터 거버넌스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데이터 커먼즈(data commons)가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커먼즈(commons), 즉 공유지는 본래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관리하는 자원을 뜻합니다. 1960년대 말 사이언스에 발표된 유명한 논문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에서 지적했듯이, 공유 자원은 개인의 합리적인 이기심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고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너 오스트롬은 ‘커먼즈의 거버넌스(원제는 'Governing the Commons: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라는 책을 통해서 이를 반박했습니다. 즉 공동체가 공통의 규칙과 책임 아래 자원을 개방하고 공동으로 관리하여 이를 지속적으로 지켜 나갈 수 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경제학에는 시장과 국가만 존재한다는 이분법을 깨뜨린 공로로 오스트롬은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현대적 의미의 거버넌스 개념을 제창하고 정립하였다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요즘은 이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서 신뢰 기반의 커먼즈(trusted commons) 개념이 등장하였습니다. 이는 전통적 커먼즈 모델에 신뢰, 안전성 및 책임의 요소를 더한 것입니다. 경제적 활용 가치가 매우 높지만 함부로 공개될 경우 정보 주체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보건·유전체 정보의 안전하고도 책임 있는 활용을 선도해 나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신뢰 기반 커먼즈입니다. 미국 NIH의 dbGaP(The database of Genotypes and Phenotypes)이나 유럽의 EGA(European Genome Archive), 그리고 KOBIC의 인체유래데이터은행이 바로 이러한 신뢰 기반 커먼즈의 사례입니다.

 

신뢰기반 커먼즈의 핵심 요소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접근 통제(access control): 데이터를 누가 어떤 조건에서 사용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정함
  • 책임성(accountability): 데이터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 사용 내역과 목적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기록을 남겨야 함
  • 투명성(transparency): 데이터가 어떻게 수집되고 누구에게 공유되며 어떻게 사용되는지 공개해야 함
  • 형평성과 포용성(equity & inclusion): 데이터 기여자나 소외된 집단도 공정하게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하며, 차별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함
  • 상호성(reciprocity): 데이터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 결과나 혜택을 다시 커뮤니티에 돌려줘야 함

지난 4월 미국 신생명공학 국가안보위원회(National Security Commission on Emerging Biotechnology)가 발간한 보고서 ‘Charting the Future of Biotechnology’에 따르면, 미국은 생명공학 분야에서 중국의 급부상을 경계하면서 유전체, 인공지능(AI) 및 바이오제조 등에서 자국의 지속적인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모델인 Web of Biological Data를 구축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이는 신뢰 기반 커먼즈의 확장판으로서 FAIR + 신뢰 기반 + AI-ready 상태의 국가적 디지털 인프라에 해당하며, 하나의 통합된 창구(single access point)를 제공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부연하자면 분절되어 존재하는 데이터 리포지토리에 대한 검색 및 활용을 한 곳에서 제공함으로써 사용자의 편의성을 높일 수 있게 한 것이지만. 신뢰할 수 있는 국가 또는 동맹국 중심의 국제 협력을 유도하기 위한 밑그림일 수도 있습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두가 국정과제를 수립하기 위한 바쁜 움직임에 들어갔습니다. AI는 이미 우리 주변에 깊숙하게 자리 잡았고, 머지않아 바이오 경제 시대에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KOBIC이 정성스럽게 모은 양질의 바이오 연구 데이터가 안전하게 널리 활용되어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고, 아울러 글로벌 바이오 데이터 저장소의 모범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KOBICian’s story는 KOBIC 멤버가 직접 작성하는 현장감 넘치는 글로서 KOBIC의 업무 방향이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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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구축사업”은 AI 시대 정밀의료 혁신의 중심축입니다. 21세기에는 데이터가 생명을 이해하는 언어이며, 인공지능은 그 언어를 해독하는 통역자입니다. 이 사업은 국민의 혈액, 조직, 임상정보, 유전체 및 오믹스 데이터를 통합해 국가 차원의 바이오 빅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하려는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입니다. 단순히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의료 시스템과 오랜 세월 축적된 개인 의료정보라는 독보적 기반 위에서 추진된다는 점에서 국제적 의미가 큽니다. 우리나라는 공공의료의 신뢰성, 기술 인프라의 완성도, 그리고 의료 데이터에 대한 국민적 신뢰라는 장점을 고루 갖춘 나라로, 바이오·헬스 AI 산업을 세계 수준으로 도약시킬 수 있는 드문 환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은 전 국민을 아우르는 건강보험 제도와 체계화된 국민건강검진 시스템이라는 강점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국민의 진료 기록, 질병 발생 이력, 처방 내역은 물론 정기검진에서 얻는 생체 지표와 임상정보를 장기간 축적해 왔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특정 시점의 의료 데이터를 단편적으로 보유한 데 그친다면, 우리는 국민 개개인의 생애 전반에 걸친 정밀하고 종단적인 건강 이력을 구축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구축한 데이터는 AI를 통해 질병의 발병 위험을 예측하거나, 치료의 장기적 효과를 분석하는데 필수적인 자산입니다. 우리나라의 의료 데이터는 ‘양’보다 ‘질’에서 탁월하며, 이 고유한 축적 구조가 바로 한국형 AI 정밀의료의 엔진이 됩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의료 데이터 활용에는 여전히 높은 규제의 벽이 존재합니다. 개인정보보호법과 생명윤리법 등은 개인의 인권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필수 장치이지만, 실제 연구나 산업 현장에서는 이 규제가 외국보다 더 엄격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의 GDPR은 명확한 동의 체계를 전제로 한 ‘활용 중심’의 모델을 구축했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보호 중심’ 규제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수한 의료 데이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연구나 산업적 혁신으로 연결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데이터 보호와 활용의 균형을 맞추는 정교한 제도, 즉 신뢰를 기반으로 한 데이터 개방 모델의 설계가 시급합니다. 국민이 안심하고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도록 투명성과 통제권을 보장하는 동시에, 연구자와 기업이 공익적 목적 아래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합니다.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구축사업의 진정한 혁신은 임상 데이터와 유전체·오믹스 데이터를 결합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이는 단순한 데이터의 병합이 아니라, 질병의 원인 규명부터 예방, 진단, 치료까지 전 과정을 새롭게 재편하는 지식의 융합입니다. 예를 들어 대규모 개인의 유전적 특성과 생활습관, 환경 요인을 AI가 통합적으로 분석하면 질병이 발생하기 전에 위험 신호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국내 모 병원에서 위암 환자의 유전체 변이와 장기간 임상 데이터를 AI로 분석해 생존율을 예측한 사례[참고]는, 한국형 데이터의 정밀성과 잠재력을 실증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연구가 더 활발해지기 위해서는, 개인정보 비식별화 기술의 고도화와 함께 연구 목적에 따른 데이터 접근 절차의 합리화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이 방대한 데이터를 진정한 자산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전문 인력도 필요합니다. 유전체 서열을 정제하고 표준화하며 주석을 달아가는 과정에는 생명정보학자, 임상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데이터 큐레이터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협업합니다. 이들은 AI가 학습할 수 있는 고품질 데이터를 정제하는 엔지니어이자, 국가적 지식자산의 조형자입니다. AI는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기보다는, 데이터를 해석·관리·활용하는 새로운 직군을 탄생시킵니다. 특히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구축사업은 한국인의 유전적 특성과 생활양식을 반영한 국민 맞춤형 생명정보 자산을 구축하여, 서구 중심의 데이터 의존도를 낮추고 생명정보 주권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정부는 법적·제도적 규제 개선과 함께 데이터 과학 인재 양성을 국가 전략 차원에서 병행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AI 시대 정밀의료의 실험실이자 모범국가로 자리 잡을 잠재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독보적인 종단(장기간에 걸친) 임상 데이터, 최첨단 유전체 정보, 그리고 이를 엮어내는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구축사업이 삼위일체로 작동할 때, 우리는 단순한 기술 수용국을 넘어 글로벌 헬스 데이터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비전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데이터 활용에 대한 과도한 규제를 완화하고 신뢰 기반의 데이터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데이터의 품질과 접근성을 지키는 국가 관리 체계, 이를 운영하고 혁신으로 전환할 전문 인재 생태계가 함께 구축된다면, 그 순환 구조는 곧 한국형 의료 AI의 지속가능한 경쟁력이 될 것입니다. AI와 인간, 기술과 윤리가 조화를 이루는 미래 — 그것이 우리나라가 세계를 향해 그려가는 지능형 바이오헬스 시대의 지도입니다. 데이터로 그리는 생명의 지도!

  • 작성자양진옥 (KOBIC 책임연구원)
  • 작성일2025-11-17
  • 조회수96
  • 댓글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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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즘 몇 개월째 취미 차원에서 몰두하고 있는 일은 MIDI와 관련한 간단한 DIY입니다. MIDI(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란 전자 악기 간의 호환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3년 여러 기업이 모여 제정한 국제 표준 규약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채널 1번에 할당된 어쿠스틱 피아노의 C4 음을 벨로시티 64의 강도로 4분음표만큼 지속하라”라는 명령어·데이터 계층, 그리고 이를 각 기기 간에 전송하는 물리적·전송 계층을 동시에 정의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채널은 16개, 즉 음원의 동시발음수 제한 이내에서 최대 16개의 서로 다른 악기의 소리를 낼 수 있으며 채널 10번은 드럼에 해당합니다.


MIDI는 음악을 다루는 데이터와 전송 방식에 대한 규약이지만 그 자체는 음성 신호가 아니라 ‘연주 이벤트’입니다. 여러분의 컴퓨터가 Windows를 기반으로 작동되고 있다면, C:\Windows\Media 폴더를 한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flourish.mid, onestop.midi, 그리고 town.mid라는 MIDI 파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 더블클릭하면 Windows Media Player가 열리면서 기본적으로 내장된 소프트웨어 음원(Roland GS Wavetable Synthesizer)에 의한 재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DIY 프로젝트를 통해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던 모든 분야를 한곳으로 집대성하는 취미의 통섭(統攝, consilience)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초보자 수준이지만 악기 연주, 컴퓨터 활용, 전자회로 만들기, 챗GPT를 이용한 코딩까지 모든 것이 어우러지고 있습니다. 중학생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취미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다가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어 한데 모여서 시너지를 발휘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나온 지 40년이 넘은 MIDI 1.0은 UART라는 직렬 통신 방식을 이용하여 5핀 원형 DIN로 초당 31,250비트의 데이터를 단방향 전송합니다. 오늘날의 기가비트 이더넷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지요. 요즘 웬만한 MIDI 기기는 서로 간에 USB로 접속을 하거나 심지어 블루투스를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2020년에 채택된 최신의 MIDI 2.0라 해도 하위 호환성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MIDI 1.0에서는 소리의 세기 등 대부분의 연속적인 값을 7비트(0-127) 범위로 양자화하지만 음악적 표현력을 크게 해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단순함 때문에 요즘의 PC나 휴대폰과 비교하면 정말 초라한 ‘8비트 16MHz의 두되’를 갖는 아두이노 나노(Arduino Nano)와 길어야 수백 줄~1천여 줄의 C++ 코드, 그리고 가내수공업 수준의 납땜으로도 MIDI 생태계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코드는 챗GPT를 살살 구슬리면 알아서 잘 만들어 줍니다.


민간협회에서 먼저 제정되어 널리 쓰이던 MIDI 규약은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에서 2017년 발행한 국제표준인 IEC 63035:2017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MIDI 1.0에서 표준으로 삼은 전송 기술 자체는 낡은 것이 되었지만, 음악 데이터의 작성과 교환 및 상호운용성 측면에서는 이 세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즉, 표준 규약을 준수하여 만들어진 음악 데이터는 어떤 음원 장비에 전송을 하여도 동등한 소리로써 연주를 함을 뜻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MIDI 음원(MIDI sound module)이 실제로 내부 샘플로 갖고 있는 소리의 품질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피아노 연주 데이터는 피아노 소리의 같은 곡으로 재생됨을 의미합니다.


MIDI 1.0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서로 다른 악기들이 ‘같은 언어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전자악기산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업체가 독점적으로 주도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합의로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개방형 표준의 정신은 오늘날 오픈 사이언스가 지향하는 핵심 가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표준화된 음악 정보는 음악 관련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MIDI와 관련한 DIY 작업을 하면서, 이는 마치 KOBIC이 몸담고 있는 바이오 데이터의 활용 생태계와 매우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포맷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때로는 레트로 열풍에 힘입어 퇴출되었다고 생각한 기술이 다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MIDI와 같이 열린 표준은 세대를 넘어 전승되고 있습니다. 


오픈 사이언스의 핵심 축 하나는 연구 결과물의 무료 공개 및 재사용입니다. MIDI 포맷으로 만들어진 음악 데이터의 상호운용성은 확실히 보장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를 중앙집중적 리포지토리에 모두 모아서 무료로 공유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순수 창작물로서 MIDI 파일은 저작권의 보호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MIDI는 개방형 인프라와 사유 재산권이 조화를 이루는 모델을 제시한 것입니다.


MIDI는 기술 표준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음악이라는 예술과 어울려져 함께 작동하는 세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오픈 사이언스가 꿈꾸는 것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데이터를 이해하고 각자의 창의력을 존중하는 세계는 음악과 같이 영원히 조화롭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 작성자정해영 (KOBIC 센터장/책임연구원)
  • 작성일2025-11-10
  • 조회수109
  • 댓글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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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컴퓨팅 분야에서 손꼽히는 학회는 미국에서 열리는 SC(Supercomputing Conference), 유럽에서 열리는 ISC(International Supercomputing Conference)가 있습니다. 슈퍼컴퓨팅 분야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제조사, 대학, 연구소 등 많은 기관과 단체가 참가하는 이 두 가지 학회는 전시회 등을 통한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각종 세미나를 통해 전문적인 지식까지 공유할 수 있습니다. 지난 6월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ISC2025에 참석하여 느낀 점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ISC2025는 슈퍼컴퓨팅 분야의 최대 학회라는 명성 그대로 배울 것이 많은 학회였습니다. 특히 두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GPU와 냉각 방식이었습니다. 2017년도 SC에서는 제조사에서 저마다 특성을 갖춘 최신 장비를 전시하였던 반면, 올해는 자신들의 장비나 제조사를 내세우기보다 모두 NVIDIA와의 관련성을 내걸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NVIDIA랑 더 친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 같았습니다.

전 세계는 지금 GPU 확보 경쟁이 치열합니다. 서로 더 많은 GPU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우리 KOBIC에서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GPU는 AI, 3D 렌더링, 딥러닝 등 관련 고부하 연산으로 인해 전력 소모가 막대하고 발열 관리가 중요하므로, 냉각 대책을 잘 마련해야만 합니다.

 

냉각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공랭식, 수랭식, 액침냉각이 있습니다. 첫 번째, 공랭식 방법은 차가운 공기로 장비를 식히는 방법으로 현재 KOBIC에서 운영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공랭식 방법은 구조가 단순하여 비용이 저렴하고 유지보수가 쉽지만 냉각효율이 떨어지고 균일한 냉각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KOBIC에서는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겨울철에는 바깥의 차가운 공기로 서버실을 냉각하고 있으며, 컨테인먼트를 활용하여 냉기를 가두고 골고루 냉각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수랭식 방법은 말 그대로 차가운 물 또는 액체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수랭식 방법은 CDU(Coolant Distribution Unit), Chiller(냉동기), 냉각탑과 같은 장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CDU는 냉각수를 세밀하게 조절해서 서버에 일정한 온도, 유량으로 공급해주는 장치이며, Chiller는 서버로 들어가는 냉각수(Chilled Water)를 열교환을 통해 차갑게 만들어주는 장치입니다. 또한 냉각탑은 Chiller에서 열교환을 통해 생긴 더운 냉각수(Condensing Water)를 물의 증발을 통해 다시 식혀 Chiller에 보내는 역할을 합니다. 결론적으로 Chiller에서 차가워진 냉각수(Chilled Water)를 CDU를 통해 서버 내부에 순환시켜 발열이 심한 부품을 직접 냉각하는 방식이며, 누수의 위험이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전산 분야에서는 이 방법을 수랭식이라고 표현하지만 인프라 분야에서는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랭식 방법이라고 해서 냉각탑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보통 Chiller에서 열교환을 통해 발생하는 열을 물의 증발을 통해 식히기 위해서 보통 냉각탑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냉각탑 없이 Dry Cooler라는 녀석을 통해 물의 증발 없이 외부의 찬 공기만으로 냉각수(Condensing Water)를 식힐 수도 있습니다. 인프라 분야에서는 전자를 수랭식, 후자를 공랭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용어의 차이 때문에 항온항습기 관련 회의를 진행할 때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세 번째는 액침냉각 방식입니다. 특수한 냉각유에 전산장비를 직접 담궈 냉각하는 방법입니다. 냉각유는 전기가 통하지 않지만 서버에서 발생하는 열을 빠르게 흡수하는 특수한 용액으로 열교환기를 통해 냉각됩니다. 액침냉각용 전산장비는 팬이 없기 때문에 소음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공기 흐름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초기 비용이 높고 유지보수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공랭이냐 수랭이냐는 단순히 냉각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비용, 유지보수, 에너지 효율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균형잡힌 데이터센터의 운영 방식을 결정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GPU 시대의 경쟁력은 단지 장비의 성능이 아니라 안정적인 냉각, 효율적인 에너지 관리, 그리고 이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의 고민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KOBIC에서는 그러한 관점으로 ‘공랭이냐 수랭이냐’의 문제를 넘어, ‘지속 가능한 슈퍼컴퓨팅 인프라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답을 찾기 위해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 데이터센터의 열을 식히기 위해 고민하고 있지만 KOBIC의 열정만큼은 식지 않을 것입니다.

  • 작성자이방혁 (KOBIC 연구원)
  • 작성일2025-11-03
  • 조회수124
  • 댓글수1